결이 다른 패션 이야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패션을 사랑하고 패션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저자에게 찾아온 터닝 포인트.
이른바 '센 패션', '힘들어간 패션'에 열중했던 그녀가 스스로를 쇼핑 중독이라 진단하며 그동안 자신을 옭아매던 트렌드와 브랜드에서 벗어나 '나를 위한 그리고 나에 의한'패션 찾기를 시작한다.
이 책에는 작가 최유리의 자아 탐색 과정과 패션을 통한 자아실현이 담겨있다.
아픔과 치유가 담긴 가이드북
'오늘 뭐 입지?'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 이렇게 심도(?) 있는 내용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두툼한 책에서 무언가는 얻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
그러나 책장을 넘겨가면서 작가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저자는 유년기의 상처와 그로 인한 결핍으로 패션에 탐닉했고 결국 쇼핑 중독으로 이어졌다. 명문 대학에 입학하고 좋은 직장을 다니게 된 후로 꿈꾸던 옷들을 손에 쥐게 되었지만 내면은 공허했다.
패션으로 인해 내면의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고 상처를 직면하여 치료해 가는 과정에 패션은 늘 작가와 함께 한다. 다만 내면이 치유되면서 그 방향과 성격이 달라질 뿐... 패션에 대한 그녀의 시행착오는 내면의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이다.
작가는 스스로를 조용한 말괄량이라고 정의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총명한'이란 단어를 더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최유리 작가의 내면 탐색 및 치유의 여정, 그리고 패션에 대한 통찰력이 결코 가볍지 않다.
패션으로 힐링하는 다섯단계
최유리 작가는 그녀의 패션에 대한 시행착오와 여정을 '패션으로 힐링하는 다섯 단계'로 정리했고 이 책의 핵심이 되었다. 이 다섯 단계는 매우 친절하고 구체적이라서 패션이 어려운 나에게 유익했으며 제법 효과가 있었다.
첫 번째, 용감한 성찰자
내 컬렉션과 스타일링의 컨셉을 잡는 과정
최유리 작가는 패션의 기본이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저 유행이라서 내 체형과 이미지에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사고 입는 것을 지양하고 내가 가진 고유한 이미지, 그리고 내가 원하고 바라는 이상향의 이미지를 조합해 내가 추구하는 패션의 지향을 정의해야 한다.
결국 패션이라는 것도 '이미지'의 연장선인 것이고, 우리가 패션을 통해 구현하고 추구하는 것도 우리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는 것이기에 작가의 제안이 매우 적절하게 느껴진다.
두 번째, 냉정한 감상자
스타일리시함의 법칙을 찾아내는 동시에 자신의 패션 취향을 확인하는 단계
두 번째 단계는 내가 입었을 때 행복한 옷만 잘 골라 사는 스마트 쇼퍼가 되는 과정이다. 한마디로, 생각 없이 아무거나 사지 않는 따라쟁이가 되지 말자는 것이 핵심이다.
최유리 작가는 '패션'은 유행에 뒤처지지 않음을 내포하며 '스타일'은 정착된 자기만의 멋을 추구'함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남들 다하는 '패션'보다는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나 자신을 표현해 줄 옷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입어도 부담이 없는 옷", "내 옷장의 어떤 옷과도 어울리는 옷", "멋스럽지만 편안한 옷", "실용적이지만 예쁜 옷"을 찾는 것이 핵심.
세 번째, 명민한 컬렉터
'나만의 룩'이란 큰 그림을 만들고 그 그림을 완성해 줄 '나만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을 쇼핑
최유리 작가가 정의하는 스마트 쇼퍼는 "싸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으로 나만의 룩을 구상하고 무엇을 구입할지 확실히 아는 사람이다.
책을 읽다 보니 책 속에 자주 등장하는 '정체성'이란 단어에 자꾸 눈이 간다. 나는 그동안 옷을 사면서 나를 생각했던 적이 있었을까? 아마도 옷을 볼 때면 그저 옷에 집중했었고, 아마도 그 옷을 저렴히 살 방법에만 열중하곤 했던 것 같다.
연예인이나 패피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나의 것과 같을 수 없을 것인데, 유행과 미디어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왔던 것이 아닐까? 결국 나의 라이프 스타일과 정체성에 맞는 옷을 '컬렉팅'하는 것이 나의 패션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한 중요한 핵심 과정인 것이다.
명민한 컬렉터의 단계는 '한 시즌동안 몇 번이나 입을 수 있는가?', '몇 년이나 입을 수 있는가?', '단지 쇼핑 혜택 때문에 사려고 하는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내가 그리는 큰 그림을 아름답게 완성해 줄 하나의 조각을 찾아내는 것이다.
네 번째, 창의적 작가
컬렉션의 작품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작품 만들기
창의적 작가란 그날의 소통 맥락에 맞게 자기 다운 옷을 자유롭게 조합하여 입을 줄 아는 사람이다. 최유리 작가는 패션이 소통의 연장선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상대의 차림을 통해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게 되고 '선입견'을 갖게 된다. 꽉 조인 셔츠와 느슨하게 풀어진 셔츠가 만남과 대화에 미치는 영향의 차이는 크다.
작가는 단지 '어울리는 옷'을 입기보다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옷차림을 하라고 조언한다.
사실 패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많지 않은 이들에게 '창의적 작가'의 단계를 다소 막막한데, 작가는 그런 우리를 위해 '색상의 조화', '여백미의 법칙' 그리고 '빼기의 법칙과 더하기의 법칙'을 조언한다.
톤을 통일하고, 화이트 색상의 분리 효과를 이용하며 헐렁한 티셔츠와 살짝 흐트러진 헤어의 여유를 경험해 보는 것이다.
다섯 번째, 진정한 나
지속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단계
작가 최유리가 전하는 패션의 궁극적인 목표는 '진정한 나' 그리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
트렌드에 민감한 패션피플들 중 패션에 자아를 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지인들 중 옷차림이 '멋있다' 혹은 옷을 잘 입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그들의 패션에는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었던 것 같다.
스키니의 홍수에서 와이드를 입거나 와이드의 흐름에도 스키니만을 고수하는 사람들... 타인의 시선과 트렌드에 민감한 한국문화에서 공고한 패션 철학과 원칙을 지켜간다는 것이 새삼 더 멋지게 느껴진다.
패션에 대한 작은 자신감
패션은 늘 어려웠다. 옷을 잘 입고 싶고 관심도 있지만 자신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거리를 두고 지냈던 '패션'이라는 영역에 뒤늦게 관심이 생겼고, 그 늦바람 덕에 이 책을 만나게 된 것 같다. 책 한 권 읽었다고 내 옷차림이 환골탈태할 순 없겠지만, 참 많은 도움이 된 책이다.
오랜 시간 갈망했지만 갖지 못했던 것의 실체가 '정체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며, 내 패션의 구멍은 '나'를 배제한 채 사들이던 옷들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적어도 이젠 나와의 접점이 없는 옷을 할인에 혹해 사는 일은 없게 될 것 같다.
젊고 매력이 넘치던 시절을 보내고서야 패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된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남은 인생이라도 '나'를 담은 스타일에 도전해 보련다.